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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속도냐 안정성이냐...갈길 먼 12차 전력기본계획
송고일 : 2026-04-23
기후에너지환경부와 제12차 전기본 수립 총괄위원회가 22일 한국방송회관 코바코홀에서 ‘12차 전기본 전력수요 전망 공개토론회’를 개최했다. /ㅜ데이에너지
[투데이에너지 장재진 기자] 전력전환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12차 전력기본계획은 재생에너지 확산과 탄소중립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분명히 수용했다. 그러나 그 담론의 중심에는 늘 두 가지 상충하는 과제가 함께 있다.
하나는 가능한 한 빨리 재생을 늘려야 하는 ‘속도’의 논리, 다른 하나는 변동성 높은 전원을 안정적으로 흡수해 국민의 전기생활과 산업경쟁력을 지켜야 하는 ‘안정성’의 논리다.
이번 전기본은 그 균형을 잡기 위한 여러 전략을 제시했지만, 실효성을 담보하기 위한 제도·재정·사회적 장치들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우리는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가. 속도와 안정성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재생 확대의 속도는 중요하지만, 계통 유연성과 송·배전 인프라의 병행 확충 없이는 재생 확대가 오히려 사회적 갈등과 산업 경쟁력 저하로 귀결될 위험이 크다.
12차 전기본이 던진 핵심 질문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정책은 ‘더 빠르게’가 아니라 ‘더 안전하게, 더 지속가능하게’ 전환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우선 12차 전기본의 의의는 분명하다. 국가 차원에서 재생 에너지 비중을 높이고, 탄소중립 이행의 시간축을 정교화하려는 의지는 정책의 무게중심을 바꿔놓았다. 재생목표의 상향과 함께 ESS(에너지저장장치), VPP(가상발전소), 수요반응 등 유연성 자원의 중요성이 공식화된 점은 긍정적 신호다. 또한 지역단위 분산전원 활성화와 주민참여형 모델 도입 제안은 개발사업의 사회적 수용성을 제고하려는 현실적인 접근이다.
하지만 현실의 난제가 녹록지 않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송전망·변전소 등 계통 인프라의 병목이다. 특정 지역에서 재생설비가 급증하면서 전력계통 연계가 지연되거나 제한되는 사례가 이미 발생하고 있다. 데이터센터 유치, 산업단지 전력수요 증가와 맞물리면 지역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이 같은 계통포화 문제는 단순한 기술적 장애를 넘어 지역 갈등, 투자 위축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재생 보급계획은 계통 용량과 동기화되어야 하며, 송·배전망 투자 로드맵의 획기적 재정비가 요구된다.
둘째, 유연성 자원의 가치화가 시급하다. 재생 전원과 ESS가 제공하는 유연성(주파수·전압 조정, 예비력 등)은 사회적 가치를 가진다. 그러나 현행 시장가격 체계는 이 가치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해 투자 인센티브가 약하다. 유연성 서비스의 상품화, 명확한 보상체계, 장기계약(PPA)과 같은 수익 안정장치가 도입되어야 민간의 대규모 투자를 촉진할 수 있다. 특히 ESS는 단순한 보조설비가 아니라 계통의 핵심 자산으로 인식되어야 하며, 이를 위한 규제 정비와 금융지원이 병행돼야 한다.
셋째, 전력시장과 요금구조 개편은 산업 경쟁력 측면에서도 중요한 과제다. 대규모 전력소비 업종, 데이터센터, 반도체 등 전력다소비 산업은 전력가격 변동성 및 공급 불확실성에 민감하다. 소매시장 개방과 직접계약 확대가 불가피하다면, 중소기업을 포함한 취약 계층에 대한 보호장치와 진입 지원책도 마련해야 한다. 계약전력 기준의 완화, 수요관리 인센티브 제공 등은 단기적으로 산업계 부담을 완화하고 장기적으로는 수요 유연성을 확보하는 핵심 수단이다.
넷째, 주민수용성 문제는 결코 기술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태양광·풍력 등 재생시설의 입지 갈등은 지역사회와의 이익 배분 문제와 직결된다. 주민지분제, 이익공유모델, 지역고용 연계와 같은 실효성 있는 보상방식 없이는 프로젝트의 지속가능성이 담보되지 않는다. 정부는 투명한 정보공개와 갈등조정 메커니즘을 의무화해 주민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
다섯째, 재원조달과 금융 메커니즘의 혁신이 필요하다. 송전망·HVDC 등 대규모 인프라 투자는 막대한 초기자본을 필요로 한다. 녹색국채, 민관협력(PPP), 정부 보증과 세제 인센티브 등 다양한 금융수단을 총동원해 투자리스크를 낮춰야 한다. 동시에 PPA와 같은 장기계약을 통해 민간투자자의 수익 안정성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
정책 설계에서 주목할 점은 ‘속도’ 그 자체를 목표로 삼지 않는 것이다. 재생 확대 속도 경쟁에서 이기더라도 계통 붕괴, 산업 이탈, 주민 갈등이라는 대가를 치른다면 정책의 정당성은 금세 무너진다. 우리는 ‘속도와 안정의 병행’이라는 원칙을 정책의 철학으로 삼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중앙정부의 전략적 조정 능력과 지역단위의 자율적 실행력, 민간의 투자 의지, 시민사회의 신뢰가 동시에 작동해야 한다.
전력전환은 기술·경제적 문제인 동시에 사회적 대화의 주제다. 정부와 사업자는 투명한 정보공개로 신뢰를 쌓고, 언론은 사실기반의 분석으로 합리적 논의를 촉진해야 한다. 특히 지역 현장의 목소리를 저널리즘의 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 지역 주민의 우려, 중소기업의 현실적 애로, 산업계의 합리적 요구를 균형 있게 전하는 것이 민주적 전환의 조건이다.
12차 전력기본계획은 방향타를 잡아주었다. 그러나 항로를 안전하게 유지하려면 선박의 엔진만으로는 안 된다. 항법 장치와 항로도, 연료 공급망과 선원들의 합심이 필요하다. 전력전환도 마찬가지다. 기술과 자본, 제도와 사회적 합의가 함께 작동할 때 비로소 지속가능한 에너지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속도를 부르짖기 전에, 먼저 안전벨트를 단단히 매야 할 이유다.
■ 용어 설명
ㆍ전력기본계획=국가의 전력공급·수요에 관한 중장기 계획으로, 발전설비 추가·축소 및 계통투자 등을 포함하는 기본 계획.
ㆍESS(에너지저장장치)=전력을 저장했다가 필요 시 방출하는 장치(배터리형이 대표적).
ㆍVPP(가상발전소)=분산된 소규모 발전원·저장장치를 통합 제어해 전력시장에 참여하는 시스템.
ㆍPPA(전력구매계약)=전력 생산자와 소비자(또는 구매자) 간의 장기 전력판매 계약.
ㆍHVDC(초고압직류송전)=장거리·대용량 전력 수송에 유리한 직류 기반의 고전압 송전기술.
ㆍ계통포화=특정 지역 송전선로·변전소의 용량이 한계에 도달해 추가 전력연계가 어려운 상태.
출처 : 투데이에너지(https://www.todayenergy.kr/)
